명동 한복판에서 길을 막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11월 11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냐고 물어보자. 어쩌다 볼일이 생겨 시내 나들이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닌 다음에야 11월 11일이 ‘빼빼로데이’라는 사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물건 하나 더 팔자는 상술이라는 사실을 뻔하게 알면서도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그리고 ‘뻬뻬로데이’는 이제 그냥 무시하고 넘길 수 없는 기념일로 자리잡았다. 소비자들은 제과업체들의 속셈을 뻔하게 알면서도 왜 덩달아 깨춤을 출까?
* ‘빼빼로데이’라고 해서 꼭 롯데 빼빼로를 사줘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롯데제과에서 그런 식으로 홍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빼배로데이’에는 반드시 롯데 빼빼로를 사서 선물로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젊은 세대들이 주로 챙기는 주요 데이들
* 1월 14일 다이어리데이 - 일년 동안 쓸 수첩을 연인에게 선물하는 날.
*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 여자가 평소 좋아했던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 그러나 요즘은 주변 모든 남자들에게 초콜릿을 선물해야 하는 날로 확대되었음.
* 3월 14일 화이트데이 -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탕을 선물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날이지만, 역시 주변 모든 여성들에게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에 답례하는 날로 변했음.
* 4월 14일 블랙데이 - 발렌타인데이에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지 못한 여자와 화이트데이에 사탕을 주지 못한 남자가 만나 외로움을 달래는 날. 옷을 비롯해 구두, 양말, 액세서리까지 검정색으로 입고, 짜장면을 먹은 다음 카페에 가서 블랙커피를 마신다.
* 5월 14일 옐로데이 - 블랙데이까지 애인을 사귀지 못한 사람들끼리 노란 옷을 입고 카레를 먹어야 독신을 면한다는 날.
* 6월 14일 키스데이 - 포틴스데이에 만난 연인들이 입맞춤을 하는 날.
* 7월 14일 실버데이 - 윗사람에게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게 하고 자신의 애인을 소개시키는 날.
* 8월 14일 그린데이 - 애인이 없는 사람들끼리 소주를 마시며 외로움을 달래는 날.
* 9월 14일 뮤직데이 - 나이트클럽 등 음악이 있는 곳에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자랑스럽게 연인을 소개하는 날.
* 10월 14일 와인데이 - 깊어가는 가을에 연인과 와인을 마시는 날.
* 11월 14일 무비데이 – 연인끼리 영화 보는 날.
* 12월 14일 머니데이 - 한 해를 무사히 사귀어 온 커플들은 남자가 여자에게 돈을 팍팍 쓰며 봉사하는 날.
XX데이의 공통점 몇 가지
위에 열거한 데이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모두 매월 14일이라는 사실. 그래서 이런 날들을 통틀어서 ‘포틴즈데이 (fourteen’s day)’라고 부른다. 둘째, 8월 14일 그린데이를 제외하고는 특정 상품의 소비를 요구하는 xx데이는 없다. 그나마 그린데이에 해당하는 청춘들이라도 굳이 그린소주만 마실 것 같지도 않다.
셋째, 키스데이와 머니데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구체적으로 어떻게 돈을 쓰라고 제시하고 있다. 특정 제품군의 수요 증진이나 특정업체들의 매출 증대에 기여하는 날들인 것이다. 그나마 돈 안들 것 같은 키스데이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키스만 쪽하고 헤어질 연인이 어디에 있을까? 오히려 분위기 있는 데서 식사하고 어쩌고 하자면 평소보다 데이트 비용이 더 들 것이다.
* 무슨 무슨 데이의 약발이 잘 먹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대상이 되는 소비자들의 정서를 잘 파악해서 자극한 다음,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xx데이가 유쾌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예를 들어 블랙데이와 옐로우데이를 거쳐도 여전히 솔로인 사람은 다시 그린데이에서 소주 한잔하면서 기회를 노리면 된다. 그래도 안되면 뮤직데이 때 다시 기회를 엿볼 수 있다는 식이다.
xx데이의 왕중왕 ‘빼빼로데이’
하지만 이 많은 xx데이 가운데서도 빼빼로데이가 으뜸이다. 2008년 매출 560억 원을 올린 빼빼로는 9월부터 11월까지 일년 매출의 절반이 팔려나가기 때문에 롯데제과는 매년 6월부터 생산라인을 풀가동해서 생산한 빼빼로를 냉동창고에 쌓아둔단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빼빼로데이가 처음부터 롯데제과의 마케팅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빼빼로데이는 1996년 부산, 영남지역의 여중생들 사이에서 날씬해지라는 뜻에서 친구들끼리 빼빼로를 주고받는 데서 시작되어서 발전한 것이다.
다른 업체들이 어떻게든 자사 제품을 소비하자는 xx데이를 만들어서 띄워보려고 애써도 절대 빼빼로데이를 뛰어넘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롯데제과는 어린 여학생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유행을 소비자들이 거부반응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적절하게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빼빼로데이’에 대해서는 일체의 적극적인 시도나 개입을 하지 않는다.
* 소비자들의 유쾌하고 자발적인 참여 없이는 절대 ‘빼빼로데이’같은 성공작이 나올 수 없다. 롯데제과가 가장 잘한 일은 ‘빼빼로데이’에 대해서 어떤 권리의 주장이나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빼빼로데이’의 금전적 수혜자는 롯데제과지만 과정을 만들어가고 즐기는 것은 철저하게 소비자들의 몫이다.
대박이 나도 항상 한발 빼고 있을 줄 아는 롯데제과의 영민한 처신
70년대 초반 10원짜리 껌부터 만들어 팔면서 성장해온 롯데제과는 이렇듯 소비자들의 미묘한 심리를 읽어내는 데 탁월하다. 2008년 여름 만주웨스턴이라는 요상한 타이틀을 달고 나왔던 영화 <놈놈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개봉과 함께 인터넷을 강타했던 ‘빠삐놈’ 리믹스를 기억하시는지? <놈놈놈>의 예고편과 사운드트랙에 롯데삼강 빠삐코 CF를 믹스시켜 만든 이 영상이 디시인사이드를 통해 공개되자 대박이 났다.
하지만 엄청난 열풍에도 불구하고 롯데제과는 이 리믹스를 이용한 어떤 마케팅도 시도하지 않았으며, ‘빠삐놈’ 열풍의 최대수혜자는 오랜 공백을 깨고 솔로로 컴백한 신화의 전진이 되었다. 롯데제과는 인터넷에서 우연하게 얻어걸린 인기에 어설프게 편승하다가는 원래 잘나가던 빠삐코의 이미지에 흠집을 입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단순하게 부자 몸조심한다고 치부하기에는 롯데제과의 판단력과 마케팅이 대단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 2008년 여름을 휩쓴 ‘빠삐놈’ 열풍의 최대수혜자인 롯데제과는
거기에 편승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제 빼빼로데이는 학교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챙기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행사가 되었다. 그리고 매년 빼빼로데이를 앞두고 롯데제과는 어른이나 스승님께 안부를 전하자는 캠페인을 벌인다. 청소년들의 정서를 자극하면서 데이 마케팅에 대한 부모님들의 거부감도 희석시키고 매출도 확대하는 그야말로 일석삼조를 노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대, 20대들은 뻔하게 속이 보이는 상술을 모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일부 기성세대들은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업체의 상술에 놀아난다고 개탄하지만, 요즘 10대, 20대들은 절대 어수룩하지 않다. xx데이의 유행은 이벤트를 즐기는 젊은 세대의 기호에 관련업체들이 가볍게 편승하는 정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뚜렷한 소비철학이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철저하게 소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들은 업체의 마케팅이 과하거나 아전인수격이라고 느끼면 즉시 관심을 거둔다. 빼빼로데이를 모방한 수많은 유사 xx데이들이 그렇게 많이 쏟아져 나와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보라. 3월 3일에는 삼겹살을 먹자고 2003년부터 축협에서 그렇게 열심히 삼겹살데이를 홍보하지만, 빼빼로데이 같은 신드롬은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다. ‘농업인의 날’인 11월 11일에 빼빼로 대신 가래떡을 즐기자고 한국쌀가공식품협회에서 매년 이벤트를 해도 별다른 호응은 없다.
* 매년 11월 11일에는 가래떡을 즐기면서 쌀소비를 촉진하자는 ‘가래떡데이’의 취지는 훌륭하지만 장관이 직접 나사서 홍보를 해도 도대체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포인트가 없는 전형적인 관변행사에 그치고 있다.
요즘 청춘들에게는 브랜드가 개성이다. 막연하게 청바지 한 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리바이스 Live Unbuttoned’나 ‘디젤 Zathan 71J’를 갖고 싶은 것이다. 방송에서는 특정업체의 상호를 밝히면 안 된다고 오락프로그램에 연예인들이 입고 나오는 의류의 상표에 모자이크 처리를 해서 내보낸다. 하지만, 이런 모자이크 처리가 그 제품의 홍보수단으로 활용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즉물적인 청춘들은 뉴스에서 말하는 ‘막대초콜릿과자’가 아니라 ‘롯데제과 빼빼로’를 어른들에게도 선물하는 빼빼로데이를 유쾌하게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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