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저녁 6시 20분.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는 올림픽대로 북단에는 미치도록 달리고 싶은 자동차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잠실역 사거리에 있는 고객사 사무실에 6시까지 도착하기로 했던 김 과장은 지금 20분째 동작동 부근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이렌이 멀리서 울리다 멈추다를 반복하는 걸로 미루어 앞쪽에서 추돌사고라도 난 모양입니다.
약속시간 20분 전부터 언제 도착하느냐고 확인전화를 하던 고객사 담당직원의 전화가 금방이라도 또 올 것만 같습니다. 머리 속이 새하얗습니다. 핸들을 잡은 손에 땀이 차오르고, 귀에서는 윙윙 소리가 쉴새없이 울립니다. 거의 1년 넘게 얼마나 공을 들여서 따낸 계약인데, 조카뻘밖에 안 되어 보이는 담당자에게 커피 한잔 못 얻어마시면서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어렵사리 따낸 첫번째 납품 건인데…..
2010년에는 기필코 끊겠다던 다짐이 무색하게 연신 담배를 빨아대면서 김 과장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지금같은 순간 길이 막히는지 야속하기만 합니다. 4시에 시작한 영업부 미팅에서 특별한 이슈도 없이 1시간 넘도록 실적을 가지고 들들 볶아대던 영업이사가 지금 앞에 있다면 목을 졸라버리고 싶을 만큼 밉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사회 나온지 14년째. 영업사원으로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김 과장이지만, 그 힘들다던 IMF 때보다 작년이 더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2010년에는 좀 나아지지 않겠나 기대를 했지만, 금새 살아날 것같던 경기는 좀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천금같은 납품 기회를 잡았는데 이 일을 어쩐단 말입니까?
* 시간은 급한데 교통체증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을 때, 누구나 한번쯤 영화
<십계>에서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상상하게 된다.
급해지니까 중학교 2학년 크리스마스 이후 발길을 끊었던 교회 생각도 납니다.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빌어봅니다. 교회에서 봤던 영화 <십계>에서 홍해가 갈라지던 장면처럼 지금 내 앞에 꽉 막힌 차들 사이로 길이 쫘악 뚫린다면 평생 주일 오전예배와 십일조를 거르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온갖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언제 왔는지 바로 내 뒤에서 시뻘건 경광등을 번쩍이면서 구급차가 숨가쁘게 삐뽀삐뽀 울리고 있습니다. 구급차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연신 길을 터달라는 방송을 하는데 꽉 막힌 올림픽대로에서 길을 터주기도 쉽지 않고, 나부터 급해 죽겠는데 길을 썩 비켜주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다른 운전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금새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구급차의 다급한 안내방송과 사이렌 소리는 아주 조금씩, 그리고 아주 천천히 멀어집니다.
* 아무리 도로가 막혀도 구급차량은 바로 지나갈 수 있도록 협조하는 시민의식이 절실하다.
지금 시간은 6시 20분. 담당직원의 전화도 더 이상 오지 않고, 마음을 비운 김 과장은 한결 여유를 찾았습니다. 사고가 다 수습이 되었는지 슬슬 길이 뚫리기 시작합니다. 잠실대교 부근에 아까 교통체증의 원인으로 보이는 교통사고의 처참한 잔해가 남아 있습니다. 화물트럭하고 충돌해서 구겨진 신문지처럼 되어 버린 승용차를 보니 섬찟합니다.
김 과장은 문득 아까 뒤에서 삐뽀거리던 구급차가 떠오릅니다. 빨리 도착했다면 몰라도 저 정도 사고면 사고운전자의 목숨을 건지기 힘들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앞으로 구급차 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길을 터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고객사 사무실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김 과장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릅니다.
* 이 글은 도로교통공단 ROTA 웹진 제 63호에 게재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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